100여개 넘던 업체들 하나 둘 닫고 50여 곳만 생존
재투자 몰랐던 시절…한복 사라지고 중국산 원단 경쟁
그래도 2대 명성 ‘신화직물’ 폐업은 “생각도 못했다”
진주는 실크의 고장이다.
진주의 실크산업은 우리나라 실크 원단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5대 명산지로 인정 받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지역의 전통산업이며 지역 경제발전을 이끌어 왔다.
하지만 중국산 값싼 원단에 밀리고 넥타이, 스카프 등 생산 제품의 한계성, 재투자 소홀, 대체 섬유의 발전 등으로 2000년대 들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위기에 빠진 실크산업을 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다행인 점인 향토산업인 실크산업을 살리기 위해 진주시를 비롯해 한국실크연구원, 실크 업체들이 신상품 개발과 판로개척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어 ‘희망’이 남아 있다.
경남일보는 현재의 위기를 살펴보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실크산업이 나아갈 방향 등을 세 번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진주실크는 지난 100여 간 진주 경제를 이끌어 왔으며 한국 실크산업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직기(手織機) 중심의 가내 수공업 산업 규모로 명성을 이어오던 진주실크는 1924년 근대적 실크 제직(製織)을 위한 동양염직소 설립을 계기로 진주에서도 현대식 설비를 갖춘 실크 공장들이 세워졌다. 동양염직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직공장으로 이후 진주실크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조일견직, 해동직물 등이 들어섰고 실크의 대명사가 된 ‘진주뉴똥’이라는 고유상품도 개발했다. ‘진주뉴똥’은 진주실크의 대중화와 함께 실크산업의 전성기를 열었다.
1960~70년대에는 ‘진주뉴똥’이 없으면 동대문 원단시장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양단(洋緞)’의 직조를 통해 전국의 포목 상인들이 줄을 서서 진주실크 원단을 구입할 정도로 호황기를 누렸다.
진주는 예로부터 풍부한 일조량과 남강의 맑은 수질로 인해 염색을 하면 실크 색상이 선명하고 곱게 나오는 걸로 유명했다. 이런 천혜의 조건과 주변상황, 기술력 등이 하나가 되어 진주실크 명성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진주실크의 우수성은 옛 문헌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진주에서 진상한 능라(綾羅)가 임금의 어의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7년 11월 14일 발행된 ‘동아일보’에 실린 ‘양잠조합창립’ 기사에도 대한제국시기 당시 진주군 문산에서 생산된 소촌주(召村紬)가 진상됐다는 내용이 있다.
한 때 100여 개가 넘는 실크 관련 업체가 있을 정도로 진주 경제의 중심이었던 실크산업.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실크산업은 1990년대부터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지금은 불과 50여 개의 공장만 남아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진주실크의 침체는 외·내부적 요인이 맞물려 있다.
옛 명성에 안주해 시설투자와 연구개발 등 재투자에 소홀했고 시대 변화에도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생산품은 넥타이·스카프·한복 등에 머물렀고 생산기술과 제품의 품질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제품 및 브랜드 홍보도 부족했다. 여기에 한복 소비가 줄어드는 등 패션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또 중국 등 100%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원사(原絲) 수급과 업체 간 덤핑 경쟁, 중국산 저가 제품과의 가격경쟁, 대체 섬유의 발전 등도 진주실크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는 사이 진주실크의 생산 및 수출은 급감했고 도미노 현상으로 국내 양잠산업도 붕괴되기 시작됐다.
지난해 3월에는 경기침체에 코로나19까지 덮치면서 2대째 이어져 내려온 ‘신화직물’이 문을 닫으면서 지역 실크업체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지역 실크업체 한 관계자는 “신화직물은 옛날 진주실크 호황기 시절 진주를 대표하던 회사였는데 문을 닫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진주 실크는 전국 생산의 72%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5대 실크 명산지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진주시를 비롯해 한국실크연구원, 실크업체들이 의기투합해 실크산업 부흥을 꿈꾸고 있다.
정희성기자